참 어른 채현국 선생과 김장하 선생 관련 책을 읽고

백재선 기자의 책읽기 산책

참 어른 채현국 선생과 김장하 선생 관련 책을 읽고

백재선 / 전임기자
요즈음에 우리 사회에는 존경받는 어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학식이 높은 엘리트들이나 경제적 부를 축적한 부자 중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해를 초탈해 이웃이나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의 능력만을 중시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러한 풍조를 당연지사로 여길 수 있지만 늙어서도 불나방처럼 권력과 부를 쫓아 헤매는 인간들이 넘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MBC 경남이 제작한 휴면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단숨에 봤다. 19세부터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모두 이웃과 사회에 기부해온 김장하 선생을 조명한 휴면 다큐멘터리이다.

영상 제작을 위해 동행 취재한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에 대해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김기자는 오래전에 우리 시대의 색다른 어른인 채현국 선생에 대해서도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책을 썼다.

직장에서 은퇴해서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나로서는 우리 시대의 참 어른으로 존경받는 이들로부터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두 책을 구해 한꺼번에 읽었다.

책은 두 어른에 대한 평전이나 전기가 아니라 옆에서 그분들의 행적을 지켜보거나 대화했던 내용을 꾸밈없이 옮겨 적은 취재 기사 스타일의 책이다. 그래서 책은 다소 무미건조하지만, 저자의 의지가 크게 개입되지 않아 책에 대한 평가는 고스란히 읽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채현국 선생과 김장하 선생의 성장 배경과 삶의 궤적은 아주 다르지만, 그들이 추구한 신념과 가치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채현국 선생은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중앙방송국(KBS)에 입사했지만 5·16쿠데타 군인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던 방송국을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나왔다. 그 이후 부친의 탄광업을 이어받아 흥국탄광 등 개의 계열사를 운영하면서 한때 개인 소득세 전국 납부 10위권 이내에 오를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1973년 박정희가 유신을 단행하면서 독재 체제를 강화하자 정권과 유착해서는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미련 없이 사업을 정리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양산의 효암학원을 인수해 교육사업에 전념해오다가 2021년 86세의 나이에 작고했다.

김장하 선생은 1944년 사천에서 태어났다. 김선생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아버지의 권유로 한약방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19살에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해 1963년 사천에서 남성당한약방을 개업했다. 1973년 진주로 한약방을 이전한 이후 2022년 폐업할 때까지 한약방을 운영했다.

김선생은 진주에서 1984년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학교를 국가에 기부했다. 그 이후 김선생은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남성문화재단 설립 이사장을 맡아 지역사회 단체와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데 헌신했다.

김선생은 약방 개업한 이후 줄곧 가정이 어려운 지역 학생들에게 매년 1억원 이상의 장학금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지급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채현국 선생과 김장하 선생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켜낸 점에 있다. 두 분은 돈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원칙을 지니고 실천에 옮겼다.

김장하 선생은 환자들로부터 받은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평생에 걸쳐 이웃과 사회에 기부 활동을 해왔다. 그가 사재를 들여 설립한 명신고등학교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로지 아무 조건 없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기부 당시 학교 재산 가치는 120억원에 달했다.

김선생은 지역사회 단체의 운영과 학생들의 장학금 지원에도 엄청난 사재를 기부했다. 장학금 수여 학생은 얼추 1천명이 넘고 금액만 해도 30~40억 정도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김선생은 그러한 기부 활동을 일체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아 기부를 얼마나 했느지 본인 말고는 알 수 없다.

김선생의 돈에 대한 관념은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된다”라는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줬으면 그만이지, 기대하지도 간섭하지도 말아야 한다”라는 자신의 평소 신조에 따라 김선생은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를 몸소 실천했다.

채현국 선생도 한때 기업을 잘 일구면서 큰돈을 벌었지만, 그는 회사 직원들이나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다. 그는 서슬 퍼런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의 탄압을 피해 찾아온 당시 운동권 인사들‧해직 언론인‧예술인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고 그들의 생계까지 챙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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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탄광 산업을 운영하면서 종업원들에게 다른 업체보다 훨씬 많은 보수와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또한 폐업할 때도 직원들에게도 규정보다 3배나 많은 퇴직금을 주었지만, 개인적으로 돈을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채선생의 돈에 관한 생각은 “재산은 세상 것이다. 개인이 혼자 이룬 것은 없다.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뿐이다 세상과 나누는 게 당연하다”라는 언급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채현국 선생과 김장하 선생이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지켜냈던 사례는 80년대 말 전교조 교사에 대한 탄압 광풍이 불 때도 당시 자신들이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 소속 전교조 교사들을 단 한 명도 해직시키지 않은 데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재단 이사장과 교육 당국이 학교 교사들의 임면권을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지만 두 분은 참교육을 표방한 전교조 교사들의 보호막이 되어 해직을 막았다.

채현국 선생과 김장한 선생은 행동 스타일은 다소 다르지만, 성품은 비슷한 것 같다. 채선생이 호방한 반면에 김선생은 다소곳하다. 그렇지만 두 분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며 소탈하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분은 자신들이 행한 선행을 외부에 알리거나 자신들을 미화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두 분 다 한때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작은 집에서 주거하고 자가용도 없이 다닐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채선생은 꼰대 같은 노인들을 비난했지만 사리 밝은 젊은이들을 존중해주었다. 김선생은 모임에서 결코 상석을 차지하지 않고 늘 말단에 앉기를 좋아하셨다.

두 분은 어찌 보면 권력이 있거나 가진 자들에게 시시하게 보일 줄 모르겠지만 이들 힘 있는 사람은 물론 보통 사람과 결이 다른 비범한 삶은 살았다.

그러기에 두 분의 삶은 나이 들어 노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나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딛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모두 권력 추구와 재물 숭배에 매달려 있는 우리 사회에서 두 분처럼 주변을 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삶을 성찰해보고 가끔은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두 분은 분명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지만 보통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한결같다.

김장하 선생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면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고 무분별한 권력과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채현국 선생은 “평범하고 시시껍절한 사람들, 작은 월급 가지고도 열심히 일하고 아웃과 잘 지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나누는 순간이 인생의 단맛”이라면서 장삼이사들 틈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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